2020년부터 접근성, 포용적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한국 사회가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체감한다. 이제 접근성은 공간을 기획하거나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고려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물리적인 시설이나 제도의 변화뿐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 역시 분명 달라지고 있다.
UX 리서치, 디자인 그리고 콘텐츠 영역에서 미션잇만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동시에 우리 외에도 더 나은 접근성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반가운 변화인 만큼, 이 지점에서 미션잇이 처음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대략 20년 전, 내가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름다운 결과물 자체보다는, 제약이 있는 환경에서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방글라데시에서의 경험과 시각장애인 마라톤 가이드러너로 활동했던 시간은 디자인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구체화시켰다.
디자인의 개념을 정의할 때 나는 그 안에 본질적으로 ‘사용자 중심’이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해왔다. 여기에 내가 주목하고 있는 디자인의 역할을 더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미션잇은 앞으로 디자인을 통해 문제 해결이 필요한 현장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찾아가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션잇이 이루고자 하는 미션에 대해 다시 한번 정의를 내려본다면 이렇다.
Design for the Unreached
오랜 기간 외면받거나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하고, 디자인적 사고로 더 나은 해결 방안을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미션이다. 이미 잘 갖춰진 환경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선택지가 적고 여건이 열악한 곳에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여러 멤버들과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다. 지금도 한국의 기업 및 기관과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동시에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로 활동의 범위를 넓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해왔고, 2026년 상반기 동안 해외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기는 캄보디아, 프놈펜이다.
스캠과 범죄로 얼룩져 있는 이미지이지만,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순수하다. 2024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열악한 환경과 동시에 디자인이 접목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찾게 됐다.

며칠 전 한국에서 온 농인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현지 농인들을 고용하여 심리적·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었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캄보디아 내에 농인은 약 56만 명 정도이고 난청인은 100만 명 내외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농인 교육과 직업훈련을 해온 Deaf Development Programme 역시 농인을 약 6만 1천 명, 난청인을 약 6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 중에서 NGO 또는 정부 기관의 혜택을 받고 있는, 그나마 교육을 받고 있고 수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사람은 23천 명 정도뿐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가족 중에서 수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도 않고,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도 없다. 실제로 이들은 대부분 직업을 갖기 어렵다. 심지어 이곳에서 가장 평범한 이동 수단인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나면 의사소통이 어려워 자신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억울하게 사고 비용을 떠안는다. 대출을 받는 조건으로 연 100~200%에 이르는 고금리를 부담하거나, 사실상 벗어나기 어려운 불공정한 계약을 맺는 경우도 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장애인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바깥에서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장애를 저주나 불운으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강하다. 나라 전체에 약 1700만 명의 인구 중 장애인 학교는 5군데뿐이다. 그러나 그 학교에 갈 수 있는 적절한 이동 수단도 마땅치 않다. 특수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전문성 있는 특수교사도 매우 부족하다. 특히 시각장애인은 지난 한 달 동안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도심 내에 보도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며 걷는 사람 바로 옆으로 오토바이와 툭툭(오토바이용 택시)이 빠르게 지나간다. 비장애인에게도 걷기 어려운 도시라면 장애인에게는 더 큰 장벽이 된다. WHO는 전 세계 인구의 약 16%가 장애를 경험한다고 본다. 결국 이곳은 장애인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발도상국에서 진행된 많은 프로젝트들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현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뉴스레터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했듯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자에 대한 이해다. 디자이너와 사용자 사이에는 언제나 경험의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와 사회적 환경이 크게 다른 개발도상국에서는 그 격차가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장기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추정한’ 답을 가져오는 것보다 현지에서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패터널리즘(Paternalism)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 번역이 쉽지는 않지만 ‘온정주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다’는 선의 아래, 정작 그들의 생각을 충분히 듣지 않은 채 무엇이 필요한지 대신 결정하는 태도다. 가령 “이 사람들은 가난하니까 학교가 필요해”, “환경이 어려우니까 이런 프로그램을 해줘야 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무언가를 도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현지의 상황과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그들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할 때 생긴다. 그러다보면 이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 문제를 해결해온 방식을 놓치게 된다. ‘함께’ 파트너십을 만들어서 우선적으로 생각을 듣고 같이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지난 6년 동안 지켜온 방법이자,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성 있는 참여형 디자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 프놈펜에 거점을 마련했다. 당장 무엇을 만들거나 해결하기에 앞서, 장기간 머물며 현지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도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미션잇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들을 찾고, 하나씩 실행해 나갈 생각이다. 여전히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장애인이 살아가기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는 일이다. 또 이동과 주거, 교육과 환경, 정보 접근 등 개발도상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얽혀 있는 여러 영역들을 경계 없이 살펴보고, 현장에서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 발견해 나갈 생각이다.
이런 일은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없다. 문제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현지 사람들과 기관,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다양한 파트너들과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현재 우리는 영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국제 NGO와 함께 언어, 문화 훈련을 진행하며 여러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고 있다. 또 프놈펜에 거점을 두고 있는 현지 소셜 임팩트 기관과 다양한 방면의 협력을 의논할 예정이다. 이미 답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 함께 답을 찾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새로운 여정이다. 기관뿐 아니라 이런 여정에 함께하고자 하는 개인들도 언제든 환영이다.
글 I 김병수 미션잇 대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저자
변화를 만드는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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