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디자인을 우리는 ‘쉽다’고 할 수 있는가? ‘쉽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신체적·정신적 능력이 다르고, 경험과 학습의 정도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키보드를 보지 않고 글자를 타이핑하는 것이나, 앱으로 계좌이체를 하는 것은 적어도 이런 환경이 익숙한 나에게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 막 글자를 배우는 어린이에게 키보드로 글자를 입력하고, 앱에서 계좌이체를 해보라고 한다면 그 일은 결코 쉽다고 할 수 없다.
보편성과 학습성의 원리
어떤 디자인을 보고 ‘쉽다’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오랜 기간 학습되어 익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이란 특정 연령이나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혹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더라도 큰 설명 없이 의미를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 ‘학습성’은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특성이다. 오랜 시간 동안 자주 접해왔기 때문에,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떠오른다. 그래서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면, 우리는 그것을 별도의 설명 없이도 쉽게 받아들인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진 요소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요소로 색상, 모양, 숫자를 들 수 있다. 색으로 구분된 정보, 단순한 형태의 아이콘, 숫자는 언어가 달라도 공통적으로 이해된다. 문화권과 관계없이 오랜 시간 반복해서 접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마치 빨간색 표지판에 가로지르는 막대기 하나가 더해지면,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무언가를 금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특정 언어를 읽지 않아도, 색과 형태의 조합만으로 의미가 전달된다. 행동을 유도하거나 공간을 이해하게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래 북유럽 뮤지엄, 도서관의 사이니지 사례를 살펴보자.

(좌)휠체어 이용 화장실과 기저귀를 갈 수 있는 곳이 함께 있다는 것을 말하는 사이니지 (우)사물함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안내하는 정보. 사물함 이용 방법을 4단계의 숫자와 간단한 아이콘으로 안내한다.

박물관별 관람할 수 있는 동물 정보를 흥미롭게 나타낸 지도, 동물의 모습이 각 구역에 나타나 있어 관람객은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하고 찾아갈 수 있다.

정보가 많다면 숫자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1720년대부터 1770년대까지의 작품은 13번부터 21번 방에, 1770년부터 1800년대 까지는 22번 방에 모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각 관람 구역에 칠해진 벽의 색상이 지도의 색상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방문자는 위치를 찾기에 훨씬 수월하다. 벽의 색상이 구역마다 다르고, 안내 지도도 색상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좌)공간에서 주로 사용된 소재로 만든 사이니지. 3층은 실제 목재로 마감되어 있고, 2층은 검정색 벽, 1층은 그레이톤으로 마감했다. (우) 목재로 주로 마감한 3층
직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어포던스Affordance
제품이나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면 ‘어포던스Affordance’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1970년대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이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환경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행동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평하고 단단한 바닥은 인간에게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Afford)한다는 식이다. 이때의 어포던스는 인간의 인지와 관계없이 환경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속성이었다. 이후 디자인 전문가인 도널드 노먼은 깁슨의 개념을 디자인으로 가져오면서 지각된 어포던스Perceived Affordance라는 개념으로 구체화 했다. 사용자가 물건을 보고 ‘아, 이건 이렇게 쓰는 거구나’를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의 손잡이가 튀어나와 있으면 사람은 ‘당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디자인에서 어포던스는 흔히 ‘직관’으로 표현된다. 보는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상태로 설명을 읽지 않아도 ‘이건 눌러야 할 것 같고, 이건 당겨야 할 것 같다’고 느끼게 된다. 조금 더 넓게 보면, 어포던스는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형태, 크기, 돌출 정도, 재질, 무게감 등 사람의 오감을 통해 직감적으로 이해되는 모든 요소가 어포던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깊게 생각하지 않고도 행동을 떠올릴 수 있느냐다.


(좌)헬싱키 아모스렉스 뮤지엄 (우)스톡홀름 노르딕 뮤지엄의 엘리베이터가 어포던스의 좋은 예다. 여기서는 출구 버튼이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다른 버튼에 5배 정도는 더 튀어나와있기 때문이다. ‘출구가 몇층이더라?’라고 고민 할 필요없이 관람객이 자연스레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유도한다. 노르딕 뮤지엄의 엘리베이터 버튼도 마찬가지다. 출구가 있는 2층의 버튼이 더 돌출되어 있고 테두리 마감도 다르다.

스티커만으로도 문이 어디까지 열리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 관람객은 그 안쪽으로 다가가지 않게 된다. 자연스럽게 안전한 위치에 서도록 행동을 유도하는 장치다.

2층임을 큰 글씨로 가리키는 동시에, 뒤쪽 사이니지에서는 노란색 그래픽으로 2층임을 강조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런데 뒤쪽의 유리창을 보면 이곳이 2층인지 모를 수가 없도록, 숫자 2가 반복적인 그래픽 요소로 활용됐다. “222222222222222222222 여기는 2층이야” 행동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관적으로 층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 어포던스를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오디 중앙도서관(좌)과 바사 박물관(우)의 사이니지는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위치 뿐 아니라 디자인이나 형태 면에서도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로 향하게 유도하기 때문에 이동 중에도 위치와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잘 행동할 수 있는 디자인을 위하여
최근 어르신들이 앱을 사용할 때 가장 적합한 입력 방식이 무엇일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핸드폰 화면의 버튼을 키우고 글자를 확대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결국 말로 직접 명령하는 방식만큼 편한 방법은 없었다. 음성 안내가 더 신뢰감을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말하기’라는 행위 자체가 오랜 시간 익숙하게 사용해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조작법을 배우는 대신, 이미 몸에 밴 방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음성 입력은 자연스러운 행위다.
엘리베이터에서 출구 버튼을 찾는 일도, 길에서 방향을 확인하는 일도, 사물함의 사용법을 이해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기억을 더듬거나 설명을 읽지 않더라도 이해되는 제품, 또는 환경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쉽다’고 느낀다. 이런 디자인은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곧 포용적인 디자인이다. 디자인의 목적은 단지 잘 보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 행동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뉴스레터 작성을 위한 북유럽 탐방은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아름다운가게 뷰티풀펠로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 사진 I 김병수 미션잇 대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저자
변화를 만드는 인사이트
MSV의 다른 글도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