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친화적인 설계와 디자인이 도시를 살린다
Child-friendly planning and design can save cities
조경 건축가 팀 길Tim Gill은 아동 친화적인 설계와 디자인이 도시를 살린다고 말한다. 한 번 상상해 보자. 도시를 설계할 때,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가 집을 나서 혼자 학교에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안심되는 환경이라면, 그 공간은 누구에게나 편리하고 안전한 공간일 것이다. 차량과 보행 동선은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있고, 사각지대 없이 개방된 충분히 넓은 보행로가 이어질 것이다. 성인이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낀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녀도 아무런 불안 없이 걸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은 혼자 다니는 어른도, 영유아 동반자도, 보행 보조기를 가지고 다니는 어르신에게도 안전하고 편리하다. 그렇기에 어린이를 생각하는 디자인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나를 위한, 그리고 미래의 나를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분리된 경험 vs 함께하는 경험
MSV <놀이>편에서 인터뷰했던 글레이저 칠드런스 뮤지엄을 비롯한 몇 곳은 한 달에 한 두 번, 일요일에 선샤인 선데이Sunshine Sunday라는 이름으로 장애 청소년들이 다른 입장객들 없이 따로 방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분리된 환경은 나름대로 편리한 점이 있다. 이 시간만큼은 주변의 시선에 대한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으니, 학생들뿐 아니라 함께하는 교사들 역시 훨씬 편안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가끔은 이런 경험이 좋을 수도 있지만, 이들이 살아갈 사회는 결국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 마트나 식당, 대중교통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하다. 만약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별도의 환경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격리나 마찬가지다.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총합이며 그것이 도시를 생동감 있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 청소년 역시 통합된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경험을 쌓아갈 필요가 있다.
특수교사 선생님들을 인터뷰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발달장애 학생들이 처음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는 시끄럽다며 불평하거나, 사서에게 조용히 시켜 달라고 요청하던 주민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학생들의 특성을 알게 되면서, 이제는 “아, 학생들 왔네” 하고 넘어가거나,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발달장애 청소년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연습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감각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주 만나고, 반복해서 마주치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콘텐츠와 구성, 분리가 아닌 함께
어린이와 디자인을 생각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가? 알록달록한 캐릭터? 형형색색의 장난감? 나름대로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디자인한다고 하더라도 일차적으로는 어른들의 세계와는 구별된 제품이나 공간을 생각하게 된다. 많은 경우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는 분리되어 따로 있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어른들의 식사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조용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린이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식당이나 카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어린이를 위한 공간을 별도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북유럽에서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어른과 어린이의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이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동선과 전시 구성이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에 가족이 함께 전시를 관람하는 것이 편안하다. 스웨덴 역사박물관의 홈페이지에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스웨덴 역사 박물관은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활동을 제공합니다.
The Swedish History Museum offers activities for the whole family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전시 부스의 거의 모든 요소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만지고,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으며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천천히 돌아보게 된다.






(우)고대 북유럽 신화를 들어볼 수 있는 오디오 체험. 스웨덴어와 영어로 되어 있고, 신들에게 젊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사과 이야기, 이둔의 사과Iduns äpplen , 토르의 낚시Tors fiske 등 여러 북유럽 신화들을 들어볼 수 있다.
자세와 소재, 분위기
아이들에게 환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신발을 벗어도 된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껏 편한 자세로 있어도 된다는 것과 암묵적인 동의다. 신발을 신고는 의자에 앉아야 하지만, 신발을 벗고서는 자유로워진다. 공간의 여유가 있다면 카펫 바닥에 누워도 된다. 어른들도 편하다.
실제 쿨투후셋의 0-9세 사이의 공간과 오디 도서관의 3층 어린이들 서가 구역에서는 어린이들이 신발을 벗고 자유롭게 다니면서 기어다니거나 좁은 곳에 숨거나 눕거나 자유롭게 자세를 취한다. 조금은 쿵쾅거리기도 하지만 그것에 특별히 신경 쓰는 사람도, 주의를 주는 사람도 없다. 그냥 편하게 대화도 하고 어디서는 울음소리도 들리고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들린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이도 부모도 자연스럽게 긴장을 푼다.

자세에 촉각과 조형이 주는 영향도 크다. 사진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퍼fur 소재의 의자에 앉는 경험과 차가운 메탈 소재 의자에 앉는 경험은 다르다. 이런 소재 위에서 몇몇 아이들은 누워서 책을 본다. 포근함과 안정감은 분명 소재에서 온다.
이 점을 핀란드 아모스 렉스Amos Rex의 스튜디오는 아주 흥미롭게 구현했다. 아이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마그마처럼 보이는 이 조형물은 굳이 안내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마음껏 넘고 뛰고 다닌다. 조형 안에서 자세를 편안하게 취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환대를 위한 요소인 것이다.

근본적 변화를 위한 마인드셋 만들기
스톡홀름 모데르나 뮤제트Moderna Museet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건축 디자인 센터 아크데스ArkDes의 스튜디오는 가족 단위 방문자들이 머물 수 있는 열린 체험 공간이다. 비치된 책을 자유롭게 읽고, 도구들을 활용해 만들고, 그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건축 디자인 센터인 만큼 대부분 콘텐츠는 건축과 관련된 것들인데, 방문했던 날은 자신만의 집을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가득했고, 내부 담당자 두 명이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만들어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있었다. 상당히 놀랐던 것은 엄마 아빠들의 열심이었다. 수년간 여러 박물관과 전시 공간을 다녔지만, 아빠나 엄마가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만 체험을 할 수 있게 두고, 부모들은 핸드폰에 집중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아무도 핸드폰을 꺼내는 사람이 없고, 모두 다 열정적으로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른들은 아이들보다도 더 열심히 각자 생각하는 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재료를 나눠주는 현지 담당자들도 인상적이었다. 아이에게만 워크숍에 참여하는 도구를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온 보호자에게도 동일하게 건넨다. 워크숍의 참여는 어린이 ‘혼자’가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다. 모데르나 뮤젯 외부에 설치된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어른들이다. 어른이나 아이가 함께 탈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린이만을 위한 요소가 분명히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함께 즐긴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우리는 왜 아이와 어른을 쉽게 분리했을까? 유교적 문화권에서 나오는 연령의 위계 탓도 크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하는 것이 질서에 어긋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가면 어른들과 아이들의 밥상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전통적으로 어떤 공적인 공간에서 어린이는 조용해야 하고 끼어들면 안 되는 암묵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뒷마당 가서 놀아라’였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아빠와 아이가 함께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어색한 모습이었다. 돌봄은 주로 여성이 담당했고, 아빠는 바깥일과 생산을 담당하지 않았던가.
한편 스웨덴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면서 출산율이 저하되는 것을 우려하며, 남성의 육아 참여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고 1974년 세계 최초로 아빠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했다. 아빠가 한 손에 라떼를 들고 유아차를 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에 소위 라떼파파라는 말이 시작된 곳도 스웨덴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웨덴에서는 어린이와 아빠, 그리고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자연스럽다.
물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공간의 외형을 설계하는 일은 레퍼런스를 찾아가면서 만들면 된다. 접근성의 디테일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이 잘하는 부분이 분명히 많다. 변화의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과로 드러난 공간보다도 이런 공간을 가능하게 한 생각과 태도다. 인식과 자세는 단기간에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와 온 가족이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아이와 어른을 나누지 않는 시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뉴스레터 작성을 위한 북유럽 탐방은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아름다운가게 뷰티풀펠로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 사진 I 김병수 미션잇 대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저자
변화를 만드는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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